중기 87% "60대 재고용" 원하지만…'중처법' 무서워 못뽑는다 [고령근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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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 대기업 중공업 계열 A사는 정년(60세)이 지난 직원들을 재고용하고 있다. 특수 장비를 다뤄야 하는 기술직이 중요한데 정년퇴직자는 늘고 신입은 줄어 현장의 숙련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전체 퇴직자 중 재고용 비율은 1%도 안 된다. 퇴직자 상당수가 재고용을 원하지만, 근무 기간에 따라 연봉이 올라가는 호봉제에선 퇴직자 재고용시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회사 20년차 부장급의 평균 연봉이 9000만원, 재고용시 급여를 20% 낮춰도 7000만원 이상이다. A사 인사 담당자는 “퇴직자 한 명 재고용할 비용이면 신입사원 두 명을 뽑을 수 있어 적극적으로 늘리기엔 부담이 있다”라고 말했다.
#2. 국내 반도체 장비업체에서 검수 업무를 하는 한모(58)씨는 정년을 앞두고 재고용 제안을 받았다. 계속 일할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제안을 수락해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업무 특성상 일주일씩 장비를 연속 가동하며 확인해야 하는데, 10년째 고혈압 약을 먹고 협심증 진단까지 받은 한씨에게 야간조 근무는 무리라서다. 한씨는 “지금은 부서 책임자라 밤에 일할 필요가 없지만, 재고용되면 후배가 팀장이 되고 다른 팀원들과 현장 업무를 공평하게 나눠 해야해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저출산‧고령화가 가속화하며 고령 인력 재고용에 대한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한 일자리 박람회에서 구직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는 고령자. 연합뉴스
한국의 저출산‧고령화가 가속화하며 60세 이상 고령 인력의 재고용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교육 수준 향상, 기술 발전으로 고령 인력의 신체적·정신적 근로 역량이 뛰어나 기업들의 재고용 의지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12일 중앙일보가 대한상공회의소에 의뢰해 근로자 300인 이상 대기업과 300인 미만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정년 퇴직자 활용 실태를 조사해보니, 응답한 대기업(255곳)의 29.4%, 중소기업(303곳)의 78.9%(계약직 36% 포함)가 현재 60세 이상 직원을 고용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소기업의 86.5%는 ‘앞으로 60세 정년이 지난 직원을 계속 고용할 계획이 있다’라고 답했다. ‘중요한 인력에 한해 계속 고용하겠다’는 응답(42.6%)이 가장 많았지만, ‘희망자에 한해’(26.1%) 또는 ‘퇴직자 전원’(17.8%)을 고용하겠다는 응답도 43.9%로 높았다.
그러나 이런 기업들도 부담을 호소했다. 연봉이 높아 선호 직장인 대기업들은 ‘인건비 부담’(37.6%)을 고령 인력 채용의 가장 큰 걸림돌로 꼽았다. 업무 중요도나 성과와 상관없이 근무 기간이 길수록 급여가 올라가는 호봉제 영향이 크다. 유일호 대한상공회의소 고용노동정책팀장은 “숙련자라고 해도 근무 기간이 긴 고령 인력은 급여 수준이 높아서 지출 대비 효율이 떨어질 수 있고, 젊은 직원들의 반발도 대기업들은 의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공서열이 강한 조직 문화도 걸림돌이다. 후배인 팀장이 선배이자 고령자인 팀원과 함께 근무해야 하는데 업무 지시가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인사팀장은 “임금피크제 대상이 되면 인사평가에서 제외돼 이전보다 업무 집중도가 떨어지고 후배인 팀장 지시를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않는다”라며 “‘고령 인력이 부서에 있으면 모시고 일해야 한다’는 불만도 많다”고 전했다. 조사에 응답한 대기업들은 고령 인력 채용시 ‘업무성과 및 효율성 저하’ (23.5%), ‘신규채용 규모 축소’ (22.4%), ‘인사 적체’(16.5%) 등도 부담스럽다고 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보다 고령 인력 채용에 적극적이다. 젊은 직원 구하기가 어렵고, 대기업보다 호봉제 채택 비중이 낮아 인건비 부담이 크지 않아서다. 지난 2022년 대한상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의 호봉제 비율은 대기업 60.1%, 중소기업 13.6%다. 이번 중앙일보·대한상의 조사에서도 중소기업의 신입 직원과 정년 직전 직원의 평균 기본급은 1대 1.479 수준에 그쳤다. 반도체 장비업체인 C사는 신입사원과 20년차 직원의 연봉 차이가 2000여 만원 정도로 크지 않은 편이다.
대기업들은 고령자 채용을 확대하기 전에 직무 난이도나 책임에 따라 급여를 차등화하는 직무성과급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 대기업 경영지원 담당자는 “50대 이상 직원들의 업무 성과나 평판이 좋아 고령 인력 채용에 대해 긍정적인 분위기지만, 정년 연장을 하게 되면 해당 직원의 근속 기간도 늘어나 인건비 상승에 따른 재정 추계, 이로 인한 신규 채용 규모 축소 등이 불가피하다”며 “직무급제라면 정년을 연장하더라도 인건비 부담이나 신규 채용 축소에 따른 반발 등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기업 노조들은 호봉제에서 직무급제로 바뀌면 성과 압박이 심해질 것으로 보고 반대한다. 실제 근로자 1000인 이상 대기업 중 노조 있는 기업의 호봉제 채택 비율은 76.3%로, 노조 없는 1000인 이상 대기업(38.5%)보다 높다. 최근 조합원 고령화가 심해진 대기업 노조가 호봉제 상태에서 고령 인력 재고용이나 정년 연장을 요구하자 ‘청년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비판도 나왔다.
SK하이닉스와 포스코, HD현대 조선 3사 등 대기업 노조는 정년을 최대 65세로 늘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회원사 124개사를 대상으로 ‘올해 임단협 쟁점사항’을 설문한 결과 '정년 연장'(28.6%)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생산성에 비례한 보수지급 체계가 구축돼야 고령 일자리와 청년 일자리의 공정한 조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선애 한국경영자총협회 고용정책팀장도 “주로 임금 수준과 고용 안정성이 높은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정년 연장이나 재고용을 요구하니 청년층의 반발이 생기는 것”이라며 “임금체계의 과도한 연공성을 줄이고 노동 시장 경직성을 해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반면, 중소기업들은 이번 조사에서 임금보다는 산업 재해 리스크(39.8%)를 고령 인력 채용의 부담으로 꼽았다. 중소기업에선 60세 이상 직원 업무의 절반(49.4%)이 ‘생산 등 현장업무’인데, 고령일수록 산업재해 위험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재해 보상 승인 사망자 2016명 중 52%가 60세 이상이었다. 올해초 중대재해처벌법이 50인 이하 사업장까지 전면 시행되면서 고령 인력 채용을 더 꺼리는 분위기가 생겼다. 충북 산업단지에 있는 한 제조업체의 임원은 “인건비가 조금 더 들더라도 생산성이 검증된 숙련 인력을 뽑고 싶지만, 산업재해라도 생기면 고령자 고용을 계속하자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의 임금 체계 개편 노력과 함께 기업 규모에 따른 정부 지원이 확대돼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는 고령 인력 채용을 지원하기 위해 2020년 기업이 재고용‧정년연장‧정년폐지 등을 개별 선택할 수 있도록 계속고용제도를 도입했다. 중소기업에 대해 고령 인력 1명당 월 30만원씩 계속고용장려금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최대 2년이었던 지원 기간을 3년으로 확대해 지원금이 최대 720만원에서 1080만원으로 늘었다. 신향숙 세종대 시니어학과 교수는 “고령 인력 채용이 확대되면 경제 전반에 걸쳐 소득 분포가 개선되고 소득 불평등 완화 같은 효과도 생긴다”라며 “이를 위해서는 고령 인력의 노동시장 참여와 생산성 향상을 지원하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혁 교수는 “고령자 산재 위험을 낮추려면 안전의 기준이 강화돼야 하고, 고령자에게 숙련훈련 역할을 맡겨 일자리를 실질적으로 늘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기사출처 : 중앙일보, 최현주·최선을 기자, 2024.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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