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 200장 써보셨습니까”… 취업 전쟁에서 좌절하는 제대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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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여러분, 이력서 200장을 써 보셨습니까?”
취·창업 성공 제대군인이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는 국가보훈부 제대군인지원센터 홈페이지의 수기란에 예비역 A씨가 올린 글의 첫 마디다.
지난 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3 중견기업 일자리 박람회를 찾은 한 군인이 기업 채용 정보 게시판을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10여 년 전 전역을 결심하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느꼈던 막막함과 절실함을 잊을 수 없다”며 해외 취업 등 민간에서 자리 잡기까지 겪었던 일들을 소개하는 A씨의 글 곳곳에는 예비역의 사회 적응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이 묻어났다.
해당 수기란에는 A씨처럼 재취업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제대군인들의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제대군인의 전역 후 재취업은 개인의 안정적 생활 보장, 현역 군인 사기 증진, 사회에 필요한 인력 확보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국방부과 보훈부가 국방전직교육원과 제대군인지원센터를 통해 재취업을 지원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제대군인의 재취업 준비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여전하다. 정책 수혜 대상인 제대군인들의 요구사항을 찾아내서 맞춤형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양질의 일자리 부족한 제대군인 재취업
매년 수천명의 직업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사회로 나온다.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기 위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계급 정년에 의한 전역 또는 장기복무 선발에서 떨어지면서 겪는 상실감 등으로 군을 떠나는 사례가 상당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오랜 기간 자신을 희생한 직업군인의 전역 후 생활을 돕기 위해 정부는 군인연금을 운용한다. 하지만 매년 전역하는 간부 중에서 연금 수령 대상(20년 이상 복무)은 평균적으로 20% 미만이다.
해군 진해기지사령부가 지난해 8월 24일 부산신항에서 국가 중요시설 통합방호 훈련을 시행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고정소득이 없는 제대군인은 안정적 수입을 얻기 위해, 연금을 받는 전역자들은 자녀 교육 등으로 늘어난 가계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재취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재취업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나이와 경력 때문이다. 기업 신입 공채는 불가능에 가깝다. 경력 채용은 관련 직군에서 이력을 쌓은 민간인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이를 극복하려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예비역 장교로서 소방공무원이 된 B씨는 제대군인센터 취업성공수기에서 “군 경호·경비작전 및 국제대회 안전 총괄 업무 경험을 토대로 방호직공무원에 꾸준히 지원했으나 탈락했다”며 “방호직 및 경호직 근무를 하며 경비지도사, 소방안전관리자 등 업무와 밀접한 관련 있는 자격을 보유한 사람이 많고, 이들과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현역 시절 경력을 활용할 수 있는 군 내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제대군인이 취업하기가 쉬운 분야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보안 및 특수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군사기업(PMC)을 비롯한 제대군인의 경력을 활용한 군 관련 일자리가 적지 않다. PMC가 없는 한국은 군 내 일자리가 이같은 역할도 하게 되는데, 규모가 작다보니 경쟁이 치열하다.
지난해 9월 16일 부산 벡스코 제2전시장에서 열린 해양수산 취업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상담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특히 단기복무자나 부사관들은 군 내 일자리 진출이 쉽지 않다. 한국국방연구원(KIDA) 홍숙지 연구위원이 최근 국방논단에 기고한 ‘국방전직지원 실태와 정책방향’ 보고서에는 군 내 일자리 취직 등을 포함한 재취업 실태가 드러나 있다.
보고서에는 지난해 6~7월 전·현직 간부와 병사 327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도 포함됐다. 이를 종합한 보고서에 따르면, 군 내 일자리 진출은 영관급에선 35.4%에 달했지만 준·부사관은 6.3%에 그쳤다.
영관급 장기복무자는 사무직과 전문직 진출 비중이 높았지만, 준·부사관은 경비·경호·운송직과 생산직 비율이 영관급보다 높았다.
전역 간부의 첫 일자리 월 평균급여도 신분과 복무기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영관급은 403만 원이지만 준·부사관은 277만 원에 그친다. 장기복무자는 354만 원, 단기복무자는 307만 원을 받는다.
이같은 차이는 군 내 직책·직급·경력 등과 관련이 있다. 중간관리자인 위관급 장교와 준·부사관을 포함하는 중·단기복무자는 부대 내에서 업무가 매우 많다. 과중한 업무로 재취업 준비를 위한 교육이나 경력 축적에 쓸 시간적 여유가 적다.
이는 제대군인의 민간 분야 적응력과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준비와 자신감이 부족하면 전역 후 직업 선택과 소득 수준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군인연금을 못받는 단기복무자, 민간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경력이 부족한 준·부사관의 소득이 낮으면 자녀 교육 등을 포함한 가족 부양에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한 육군 장병이 방독면을 쓴 채 조준경을 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전역하려는 간부의 재취업 준비를 위한 부대 여건도 변수다. 지휘관을 비롯한 부대의 분위기가 취업 준비에 비호의적이라면 전역 이후를 위한 대비는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제대군인센터 취업성공수기에 따르면, 앞서 언급했던 A씨는 해외 근무가 가능한 회사의 면접 일정이 혹한기 야외 훈련 통제관 일정과 겹쳤다. 전전긍긍하다 통제단장인 부사단장에게 보고하니 “갔다 오라”고 허락해 면접을 마쳤다.
반면 예비전력 담당관 시험을 준비하던 예비역 장교 C씨는 거듭되는 업무로 공부가 쉽지 않았다. 대대전술훈련 평가와 시험 날짜가 겹치면서 고민하다 공부를 중단하고 훈련에 임해 훈련에선 좋은 성적을 받았으나 시험에는 떨어졌다.
전역을 앞둔 군인이 전직 준비에 전념하도록 동료와 상관, 후배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전역장병 전직지원 패러다임 전환해야
국방부와 보훈부는 제대군인 취업 지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산하 국방전직교육원에서는 전직 관련 진로 탐색과 교육, 상담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보훈부 제대군인지원센터는 취업 알선 등을 해준다.
하지만 민간 분야 고용률이 대폭 증가할 조짐이 없는 저성장 기조가 지속되고, 지식의 활용 주기가 매우 짧은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눈앞에 다가온 현실에서는 기존 방식의 취업 지원과 재교육의 효용성에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3 중견기업 일자리 박람회에 참가한 한 군인이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이와 관련해 국방부, 보훈부, 계룡대의 제대군인 지원 기능을 한데 모아 제대군인 개개인에 대한 맞춤형 정보제공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대군인들이 이력서를 수십~수백통씩 쓰고도 낙방하며 좌절하는 시행착오를 겪는 것은 관련 정보나 지식이 부족하고, 자신의 적성과 경력에 맞는 직종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낮은 것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제대군인 본인의 적성과 군 경력 및 교육 실적을 융합해 재취업 확률이 높은 민간 분야와 재취업에 필요한 자격증 등을 함께 추천하는 기능을 갖춘 프로그램을 제대군인에게 제공하면 재취업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상담원이 감당하기 어렵다면 인공지능(AI)에 의한 프로그램 개발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제대군인 재취업 관련 교육이나 진로탐색 등을 군 교육훈련의 일부로 분류하는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군의 기술이 민간보다 우수했던 과거에는 군인이 민간 분야의 지식을 일찍부터 배울 필요성이 낮았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민간 분야 기술이 군을 앞서는 사례가 많다. 군인이 이를 잘 배운다면, 조직관리에서부터 국방연구개발에 이르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군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민간 분야 지식과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이를 전역 후 취업을 위한 사전 교육에 접목하면, 간부들은 전역 이후의 생활을 준비하면서 현재 맡은 임무 수행에 응용할 수 있는 기술을 함께 배우게 된다.
계급 정년 시기보다 한참 앞선 시점부터 전직 준비를 하는 것이므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어느 정도 줄이면서 현재 맡는 업무의 효율성도 높이는 효과가 있다.
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3 중견기업 일자리 박람회에서 한 구직자가 수첩에 메모를 하며 면접 준비를 하고 있다. 뉴스1
제대군인 재취업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노력도 필수다. 국민 공감대나 관심이 낮은 정책은 힘을 얻지 못한다. 이는 전직 지원금 인상 등 관련 제도 개선 동력 확보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를 위해선 국가안보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헌신한 제대군인의 명예를 드높이고, 군경력을 인정하는 민간 분야 범위를 확대하는 등 범정부적 차원의 정책이 집행되어야 한다. 군 주도로 군 경력과 연계된 양질의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만드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근 국방부는 ‘초급간부 자존감 고양과 기 살리기 문화 조성’을 강조하고 있다. 단기간에 병사 봉급이 대폭 인상되고 초급간부 급여와 격차가 줄면서 하사와 소위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토로하는 것이다.
급여나 수당 인상, 숙소 개선 등을 통해 초급간부 처우를 개선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전역 이후를 걱정하지 않고 군복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제대군인 재취업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것도 필요하다. 전역 후의 인생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선 초급간부의 사기 진작 정책은 그 효과에서 한계가 있다.
‘미래에는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힘든 군복무도 긍정적으로 이겨낼 힘을 얻는다. 제대군인 재취업 지원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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